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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평범한 일상들

결혼 3년차 주부 내가 아직 쌀 값을 모르는 이유





아침에 밥을 지으려고 쌀통의 버튼을 누르는데 촤르르르~~경쾌한 쌀 부딫히는 소리 대신 칙~칙 소리만 납니다.
열어보았더니 어느새 쌀통이 비어버렸네요.
봄에 40kg 한 가마니를 받았는데 맨날 밥만 먹고 살았는지 언제 다 먹어버렸을까요?

탈탈 털어 겨우 전기 밥솥에 불을 켜고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친정에 전화해 쌀 떨어졌으니 쌀 부치라고 할 심산이었죠.
생각해보니 엄마와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한지 2주가 넘었네요.
예전 같으면 한 달 만에도 전화해서 필요한 용건만 말하고 툭~끊어 버렸을텐데 그래도 아기 엄마가 되고 점점 철이 들어가는지 조금은 염치라는것도 생기고 부모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어 그냥 안부만 전하고 끊었습니다.

결혼하고 주부 3년차가 된 지금도 전 아직도 쌀값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한 번도 제 손으로 쌀을 사본 적이 없으니 알 필요가 없었지요.
오랜만에 전화해 쌀 부치라고만 말하기 민망해 오늘은 그냥 끊었지만 조만간에 다시 이야기 하면 쌀을 살 일은 없을테니 앞으로도 쌀값은 모르고 살겠지요.

출판사에 다니시다가 IMF 터지고 갑자기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하시고 고향이신 논산에 귀농하신지 어느새 십수년이 되었네요.
뽀얗고 예쁜 엄마가 학교에 오시는게 자랑스러워서 학부모 간담회 날이나 운동회날이 얼마나 기다려졌었는지...
정작 맞벌이로 바쁜 엄마 대신 아빠가 오시는 일이 더 많았지만요.
그래도 또 아빠가 학교에 오셨다 가시면 친구들은 물론 담임 선생님까지도 아빠가 너무 멋지시다고 한 말씀 해 주셔서 으쓱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에서, 친구분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던 멋쟁이셨던 우리 부모님 이제 농사꾼이 다 되셨습니다.
엄마의 뽀얀 얼굴은 햇볕에 붉게 그을렀고 잡티하나 없던 피부에 검버섯이 생기셨습니다.
제가 대학교때까지 보았던 엄마의 손은 아이 셋 둔 아줌마 손 같지 않게 가느다랗고 부드러웠는데 그래서 엄마가 제 손이며 얼굴을 쓰다듬어 줄 때의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었는데 이젠 손은 마디가 굵어지시고 험한 흙 들에 긁혀 손끝은 다 갈라져 뻣뻣함만이 느껴집니다.

목이 살짝 늘어진 티셔츠도 잘 안 입으시던 아버지 이젠 누더기 같은 옷에 빵꾸난 양말도 서슴치 않고 신으시며 "아야, 여기서 멋이 다 뭔 소용이여...편하면 되었지." 라며 숱이 점점 줄어가는 엉성한 머리칼을 넘기십니다.

무 경험에 자본도 없이 맨땅에 농사를 지었으니 처음부터 성공했을리는 없지요.
한 5년 동안 숱하게 실패 하셨지만 이젠 딸기 하우스도 10동으로 늘리시고 자식들에게 나누어 줄 감자,고구마, 고추, 깨,파, 마늘, 양파, 쌀,호박 까지...못지으시는 농사가 없으시고 밭 마다 각종 과실과 채소들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가끔 친정에 가서 땡볕에서 구슬땀을 흘리시는 부모님을 보다 못해 잠시 밭에 들어갔다가 10분도 못 채우고 나 죽는다고 뛰어나오는 저를 보면서 부모님은 뭐가 재미있으신지 껄껄 웃으십니다.
"우린 맨날 하는 일이니깐 괜찮다. 넌 저기 그늘가서 하랑이랑 냉장고에 수박 있응께 그거나 꺼내먹어라."
그럼 철없는 저는 또 하랑이를 핑계대고 슬그머니 그늘로 숨어듭니다.

젊고 건강한 저도 10분도 못 버티는 고된 농사일을 저희 부모님은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힘들게 농사지은신 곡식들과 과실들은 대부분이 저희 자식들 차지지요.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다가도 힘이 불끈 나신다나요?
갈 때마다 트렁크가 차고 넘치도록 바리바리 싸 주십니다.
그것도 부족해 가끔은 택배로도 부치시기도 하시고...

힘든 노동에 부쩍 술이 늘으신 친정 부모님들 예전엔 소주 한 잔에 바로 넋다운 되서 주무셨었는데 요즘은 낮 술도 서슴치 않으시더군요.
두 분다 혈압도 높으신데 밖의 온도보다 두 배는 높은 비닐 하우스에서 일하시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시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만만한게 친정이라고 기분 안 좋은 일 있거나 마음에 안드는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전화해서 투정 부리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을 더 많이 하게 되고 가끔씩 넋두리를 늘어놓으시는 엄마의 전화를 신경질 적으로 끊어 버리기도 합니다. 
효도는 바로 지금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자꾸만 나중에 나중에...미루게 됩니다.

든든하게 도움도 주고 부모님 잘 챙겨드리는 큰 딸과는 달리 항상 드리는 것 보다는 요구하는게 더 많은 둘째 딸이지만  나이가 들고 자식을 낳아도 철이 들 줄 모르는 부족한 딸내미라 당신들은 자꾸만 더 걱정되고 애틋하신가 봅니다.
퍼주고 퍼주고도 더 줄 것이 없나 찾고 또 찾으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받기만 하다 보니 당연하게 받던 모든 것들이 새삼스레 감사하고 죄송스런 마음이 드네요.

엄마,아빠 항상 건강하시고요, 항상 보고싶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사셔야해요...그래야 나중에 한다는 제 효도 받아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