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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여행을 떠나요

나를 살린 스피드 011 _ 제주 '조난의 추억'

얼마 전에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비행기를 타고 콘도에서 묵고, 를 렌트해 정말 편안한 여행을 했다.

나이가 들어서? 애가 있어서? 힘들어서? …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한 이런 저런 핑계들이다.


 


내 나이
25,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제주 하이킹을 간 적이 있다.

4일 바싹 아르바이트를 해서 30만원을 벌어 충동적으로 떠났다.


인천공항이 아닌 부두에서 출발해 10시간 이상 배를 타고, 자전거를 렌트했고,
바퀴벌레가 가득한
민박집 이라도 가격만 싸면 OK였다. 비가와도 좋았고,
시원한 바다 바람이 그냥 좋았고,
방학이 너무 길어서 마냥 좋았던 시절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땀 범벅이 되어도 언덕 위에 다다르면
내리막 길이 있다는 이유로 좋았다
. 필름카메라를
들고 현상하는 날을 기대하며 설레었고,
젊음을 만끽할 수 있음에 무엇보다 좋았다. 그 땐 그랬다.



 

얼마 전의 편안했던 제주 여행을 가만히 반추하다 갑자기 힘들었지만 너무도 좋았던

8년 전의 제주 여행이 떠올랐다. 여행 첫날 통제 된 '오름'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했던,
정말 어처구니
없었던 당시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잠시 8년 전으로 돌아가 봤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가장 충만했던 2001년 7월9. 여행 첫 날 

 

자전거 대여소에서 처음만난 재관이와는 오늘 코스까지만 같이 동행하기로 했다. 첫 도착지인 산굼부리로 갔다.
가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속의 거대한 분화구를 지나 또 다른 분화구인 아부오름으로 갔다.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젊고 혈기 왕성한 우리는 철창을 넘나들며 스펙터클한 경관에 감탄했다
. 내려오는 길에 도랑에 빠진 경운기 꺼내는
일도 도와 드리며
, 지루한 일상에서 탈출한 신선함과 가슴 벅찬 제주 여행의 짜릿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다음코스는 다랑쉬 오름. 비가 많이 온다. 비바람을 헤치며 열심히 달려 도착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통제구역이
되어있었다
. 잠시 망설였다. 고민도 잠시, 젊고도 철없던 우리는 철조망을 넘어 산 정상을 한 번 바라보고 힘차게 오르기
시작했다
. 그 때 시각
530. 경사도 가파르고, 비도 많이 와서 길이 많이 미끄러웠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이더니
결국 정상이다
. 뿌듯하다. 바람이 정말 쌔다. 기분 좋~. 사방으로 바다가 펼쳐진 제주의 멋진 풍경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시계를 보니 어느덧
7.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비는 어느새 그쳤다.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정상을
탈환한 기쁨도 잠시
. 서둘러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이 안 보인다. 무작정 계속 내려갔다. 내 키만한 가시 넝쿨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 돌아서 다시 내려갔다. 여전히 길은 없다.

 

"나 못가!" 힘 없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

"안돼! 해 지기 전에 내려가야 돼!" 배가 고파 미칠 것 같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 깔리기 시작한다. 나랑 재관이는 너무지쳐 내려가는 것을 포기했다. 정상에 초소하나가 있던게
생각나 초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자자고 했다
. 그런데, 독재자 창배형은 안 된다며 혼자 길을 찾는다. 이제 밤이다.
저 먼 곳에서 창배 형 목소리가 들린다
.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 "한이야 ! 한이야 ! 어딨어!"

 

난 더 이상 대답할 힘도 없어서 가만히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갔다 왔는지 양쪽
다리가 긁히고 피가 송글송글 맺혀있다
. 우리가 안 보여서 허겁지겁 키만한 가시덩굴을 헤치고 왔단다. 안쓰럽다.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비도 없이 온몸이 흠뻑 젖은 나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팠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다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그런데, 재관이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냈다. 스피드 011 ...119와 경찰서에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우리의 0X9는 불통... 마음속으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리다 너무 추워 초소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바람이라도 없으니 살 것 같았다. 옆에 보니 유통기한이 언젠지 모를 흙설탕과 커피가 있다. 열심히 퍼먹었다. 신세 참 처량하고 불쌍하다.

 

역시 스피드 011. 119소방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온다. 얼마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방대원, 경찰관이 눈앞에 서있다. 시계를 보니 10시반. 한심한 듯 우리를 쳐다보시더니 바로 길을 안내하신다. 그렇게 가까운 뒷길이 있을 줄이야…

불쌍한 우리에게 민박집도 잡아주시고 밥도 사주셨다
. 정말 고마우신 분들… 인심좋은 제주도...

 

이런 사연으로 인해 혼자 여행을 왔던 재관이와 우리는 78일간의 제주기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민박집에서 샤워하고 빨래하고... 벌써 새벽3. 아무리 씻어도 진흙범벅 된 발은 잘 씻기질 않는다. 다리에 난 상처들이 이제서야 쓰리다. 짧고도 힘든 우리의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났다. 내일을 기약하며 굿나잇~

2001년 7월10
의 새벽은 그 어느날 보다 편안했다.



 

그리고 지금은 2009 10.
그 시절이 참 그립다. 함께했던 친구가 그립고, 근심 걱정 없었던 시절이 그립고,

자전거만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그립다. 무엇보다도 걱정, 근심을 능가했던

열정이 충만했던 내 자신이 그립다.

 
제주 여행을 마치고 다시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캠프장에서

하랑이 엄마를 만났다. 그리고 6년 뒤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Oh, my god!!!!


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