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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평범한 일상들

보증금 300만원 월세 살면서도 행복한 이유



수원에 사는 친정 언니집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의정부에서 수원까지 서울을 가로질러 경기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전철로만 1시간 50분은 가야하는 꾀 먼거리지요.
24개월 딸내미를 방패삼아  예전같으면 한 번 앉아 볼 엄두도 못낼 노약자 장애인석에 앉을 수 있는 호사까지 누렸습니다.

전철에서 곤히 잠든 딸내미를 무릎에 앉히는데 맞은편 좌석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립니다.

그 곳에는 할머니 두 분이 앉으셔서 이야기 중이시더라구요.

한 분은 딱 보기에도 G모 명품 가방에 모피 모자에 숄까지 귀티가 꾀 흐르는 할머니셨구요,
또 한 분은 그다니 값비싸 보이는 입성은 아니셨지만 보기 좋게 잘 손질된 깔끔한 차림새에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큰 쇼핑백 두 개를 짐으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전철에서 우연히 합석하게 된 처음 만나신 사이인 듯 한데
연륜들이 있으셔서 그러신지 오랜 친구를 만난 것 처럼 이야기 꽃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먼저 그 귀티나는 할머니께서 말을 걸기 시작하셨지요.
이야기의 내용은 대강 안성에 10억에 호가하는 땅이 있고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고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니 이제 재산이 한 20억도 안남았다거나,
뭐 자식이 용돈을 얼마를 준다거나 뭐 이런식의 내용을 한참 동안 자랑스레 이야기 하시더군요.
꾀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기에 건너편에 있는 저에게까지 이야기 소리는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마침 읽을 거리를 미처 준비를 안해갔던 저는
'처음 만난 것 같은데 참으로 본인 자랑을 많이도 하고 싶으신가 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두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러다 한참을 자랑하시던 할머니, 이제 자랑이 다 끝나셨는지
"근데 어디를 가우? 이렇게 큰 보퉁이를 들고?"

거의 20분 가까이  듣고만 계시던 다른 할머니께서 대답하십니다.
"네...아르바이트로 난초을 키워서 필요한 사람에게 배달을 하는 일을 해요.
처음에는 그저 화초들이 좋아서 시작했는데 아는 사람 소개로 알음알음 배달하다 보니
이것도 수입이 꾀 짭짤해서 4~50만원 벌이가 되네요."

잠시 숨을 고르시던 할머니는 계속 말을 이으셨습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벌으니 손주 녀석들에게 가끔씩은 용돈을 줄 수도 있고
또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니 눈치 볼 일도 없지요.
난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없어요. 자식들에게 물려 줄 것도 없지요.
그저 키워 놓으니 자기 앞가림들을 하고 사는 자식들이 내 재산이라면 재산이요
다행히 건강해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자식들 키웠던 정성을 이 화초들에게 쏟아주고
또 이 화초들 배달 핑계로 여기저기 유람까지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

정말로 그 할머니는 참으로 평온하고 행복한 얼굴이셨습니다.
"하나는 종로 세운상가에 배달하고 하나는 저희 집 근처인 당고개로 배달 해줘야지요.
다들 개업 했다나봐요. 그러고 집으로 들어가야지요.."

할머니께서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사이에 차는  할머니께서 내리셔야 한다는 종로 3가역에 도착하려 합니다.
"보증금 300짜리 월세집에 살지만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도 않고, 내 몸을 뉘울 수 있는 따뜻한 집이 있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 손으로 해 먹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 할 일이지요.하나님께서 저에게 재물은 안 주셨지만 대신 건강을 주셨으니 그게 더 큰 행운을 주신게 아니고 뭐겠어요. 그럼 조심히 가시고 건강하세요!"
마지막으로 다소곳하게 인사까지 하신 할머니는 보퉁이들을 챙겨 서둘러 내리셨습니다.



재물 대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는
할머님의 마지막 말씀이 묘하게 제 귓가를 계속 맴돌았습니다.
항상 없다, 어렵다, 힘들다...
불평 불만만 많은 제 자신을 한 번 더 되돌아 보게 하는 말씀이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셔도 건강 하나만으로 행복하신 할머님에 비해
전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둘째 치고라도 
그 할머님보다 족히 40년은 젊고 건강하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전 이미 부자이며
정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