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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평범한 일상들

고장난 네비게이션 고치지 않고 여행 떠나면?


2007년 여름이었던가?
우리도 말로만 듣던 네비게이션을 구입했습니다.
없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네비게이션이 생기고 나니 새로운 곳을 갈 때는 물론
아는 곳까지도 네비게이션을 켜놓고 거기에 의존해서 운전을 하는 일이 많아지더군요.



뭐...물론 네이게이션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면 참 편리하고 그만큼 고마운 물건이 없지요.
그런데 우리 네비게이션...처음 산지 한 달 만에 접속 불량으로 A/S 신세를 지더니
그 뒤로 수시로 자기가 켜지고 싶을때 켜지고 안내하고 싶을 때만 안내를 합니다.

더 웃긴 건 요 네비녀석이 사람을 가리는지 운전 잘 하는 하랑아빠가 운전할 때는 잘만 안내 하면서
꼭 초보운전인 하랑맘이 운전 할 때만 언제 켜질지 함흥차사에
가끔은 목적지에 다 다르도록 안내를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서투른 운전에 방금 갔던 길도 까먹는 타고난 길치인 하랑맘 매 번 네비 때문에 골치를 썩다가
하랑아빠에게 "오빠 네비가 진짜 이상해...진짜 어제는 파주 이모네 가는데 집에 도착하도록 안 켜져..."
라는 등의 이야기를 수차례 하곤 했었죠.
아무리 이야기 하면 뭐 합니까...
본인이 운전할 때는 잘만 되는 네비를 보며 "니가 잘 작동을 못 시키나보네...잘만 되는 구만...!!!"
알아서 켜지고 꺼지는 네비 작동할게 뭐가 있다고...ㅡㅡ+
살짝 짜증이 났지만 귀차니즘 많은 하랑맘 되면 되는 데로 안 되면 안 되는 데로 그렇게 지냈습니다.

지난 주 하랑아빠의 휴가를 맞아 만삭의 몸을 이끌고 조금은 무리스럽게 떠난 변산 대명리조트.
얼마 전에 썼던 후기처럼 아주 신나게 잘 놀고 돌아오는 길이었죠.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까지 먹고 저녁 7시 30분쯤 논산에 있는 친정으로 출발하였지요.
그런데...요노무 네비가 도무지 켜질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사실 변산이 지도의 어디쯤에 붙어 있는지 조차 잘 몰랐던 하랑맘과 하랑아빠 당황스러웠습니다.
지난 주 전국을 강타했던 태풍으로 인하여 억수같이 퍼 붓는 폭우에 이미 칠흙 같이 어두워진 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길에서 정말 난감한 일이었죠.




"오빠 일단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네비가 켜지길 기다려 볼까?"
"에이...언제 켜질지 모르는데 이런 날 갓길에 차 세워두는 것도 위험해...그냥 일단 가 보자..."
"아...근데 이정표에 쓰여 있는 게 다 처음 보는 지명이다...여기가 어디지...ㅠㅠ"
한 20분쯤 돌았을까요?
"오빠 저기 대명리조트다...다시 왔네...ㅡㅡ;;"
"어...부안이다...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아까 부안 지나왔던 것 같애..."
"새만금 간척지? 우리 저기 지나왔잖아...내가 어 여기가 새만금이네 그랬잖아..
저쪽으로 가자..."
"전주? 우리 여기 지나면서 원광대 얘기 했잖아...저 쪽인 것 같애...200m에서 오른쪽 길이래..."
"아...차라리 고속도로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어디로 가야 고속도로가 나오는지 알아야 말이지..."
올 때는 잘 되었던 네비에 의존해 국도로 왔던지라 이정표 하나 확실히 봐 둔 것도 없고...
온통 그랬던 것 같애...이쪽인가? 아닌가? 하며 겨우겨우 호남 고속도로에 올랐습니다.


출발한지 2시간 30분만에 도착한 논산IC.
1시간 남짓이면 도착했을 거리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며 좋아라 하던 우리부부...
이제 다 왔다 믿어 의심치 않으며 요즘 한창 열혈 시청중인 "여우누이뎐"까지 틀었지요.
"진짜 웃긴다...아직도 GPS는 연결 되지 않는다면서 DMB 수신은 끊기지도 않네.."

친정 부모님이 귀농하신지 10년 남짓...
그래봤자 고속도로 통해 친정집에 왔다 다시 고속도로 통해 집게 갔던 게 전부요
어릴 적에 가끔 시골집에서만 몇일 씩 놀다 간 것 외에 크게 논산을 돌아다녀 본 일도 없으면서
그래도 생판 모르는 길을 찾아찾아 여기까지 왔는데...
왠지 홈그라운드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죠.

"양촌이다...오빠 울 집 양촌에 있잖아."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자마자 있는 이정표에 쓰여 있는 낯익은 지명...!!!
바로 우회전을 했으나 낯설고 낯설은 이 길로 나오면 뭐가 나올까 싶은 그런 길이기에
"이 길이 아닌가? 이정표는 이쪽이라던데...에이 어디로 가든 나오겠지...다른 길로 일단 나가자."
"가야곡? 어 저기 울 집 근처에 있는 계곡 이름인데...저쪽으로 가볼까?"
이렇게 시작 된 우리의 길 찾기...
중간 중간 "못 찾겠으면 아빠 부를까?"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 장인 어른께 오시라고 하지...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새벽부터 일하시느라 고단 하실 텐데 주무 실거야...아마...조금만 더 찾아보자..."

아마도 논산시 양촌면에 있는 산이란 산, 마을이란 마을은 구석구석 다 돌았던 것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빗줄기와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 
길 안내는 하지 않아도 DMB 만큼은 그 산길에서 조차 끊기지 않는 우리의 네비...
때마침 초옥에게 빙의된 연이의 혼령을 쫓기 위한 갖가지 비방과 굿 소리를 들으며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야 했던 우리...



당장에라도 구미호며 처녀귀신이 차 앞을 막아선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밤이었고
그럼에도 경황이 없던 우리는 미처 TV를 끌 생각조차도 못했습니다. ㅠㅠ
어느새 시간은 11시 10분...'여우누이뎐'은 끝났습니다.
"휴....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나도 무서워 죽을 뻔했어...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서워...
이거라도 안 봤으면 덜 무서웠을걸...왜 끌 생각도 못 했을까?"
"그나저나 여기 어디지?"
그렇게 40분쯤 더 헤매이던 끝에 드디어 친정집이 있는 마을 입구가 보입니다.
"앗..저기다. 저기...다왔다..."

친정집에 다 다르니 올 시간이 지났는데 도착하지 않는 딸내미를
걱정스레 기다리셨던 부모님께서 뛰어 나오십니다.
"어...엄마 아빠 안 잤어? 길을 몰라서 헤매는데
엄마 아빠 잘 까봐 전화 안하고 어떻게든 찾아왔는데..."
"전화 하지...올 사람이 안 오는데 어떻게 자겠니...고생했다...
우리도 너무 안 오길 래 전화라도 할까 하다가 비도오고 밤길인데 괜히 전화로
어수선하게 만들까봐 안 했더니만 전화 할 걸 그랬나보다..."

물놀이에 지쳐 길을 헤매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잠든 딸내미를 눕히고
부모님이 펴 두신 폭신한 이불에 몸을 누이며
오늘 산길을 헤매었던 일이 마치 꿈만

같았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계는 기계일뿐...
고장나면 이리 막막해지는 것을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을
한번 검색조차 해보지도 않고 잘 되지도 않는
네비게이션만 믿고

먼 길을 떠났던 우리 부부의 안일함 덕분에
생각지도 않게 생고생을 하였네요.

조만간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구석구석의
도로가 잘 표기된 지도책도 하나 마련하고

우리를 골탕 먹인
요...네비게이션...

당장 바꿔버리고 싶지만...!!
일단 하랑이네 애마를 바꿀때까지는
사용하되
꼭 A/S는 받아야겠네요.
아니면...
아는 길만 다니던지...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