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은 연신내였고 정발산에 있는 놀이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바로 3호선 지하철이었지요.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섭게 내리는 장대비였지요. 정말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수 있나요. 빗속을 뚫고 지하철을 탔을 때는 이미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전 무슨 바람이 불었었는지 핫핑크 샤랄라 원피스에 핫핑크 공주 슬리퍼를 신고, 머리는 예쁘게 셋팅까지 말았습니다. 어설프게 부린 멋 때문에 더욱더 추레해진 몰골이었지요. 그런데...그렇게 열심히 빗속을 뚫고 지하철을 탔건만 연신내에서 구파발까지 겨우 한 정류장 이동하더니 지하철 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런 낭패가... 안 그래도 심히 망가진 스타일 또 이 빗속을 나가야 하다니..."이런...XX 그럼 요금을 받지 말던가. 받을 거 다 받고 한 정류장 와서 내리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투덜거리며 지하철 밖으로 나오는 찰라...갑자기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며 발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는데, 이유인 즉 오늘따라 샤랄라하게 입은
핫핑크 원피스에 맞추어 신은 핫핑크 공주 슬리퍼 한 짝이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로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평소 굽 높은 신발을 즐겨 신지 않았던 탓에 어정어정 어설프게 걸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비 오는 날, 그것도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그런 옷에 그런 신발을 신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어떡하지? 선로로 뛰어내려가 저걸 주워? 안돼...신발 한 짝을 목숨과 바꿀 수는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는데 뾰족한 생각도 나질 않고 할 수 없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려 당황한 저는 한쪽은 맨발, 한쪽은 7Cm굽의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어머...김쌤...여기서 뭐해? 다리 다쳤어? 왜 이렇게 절어?"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 이였습니다.
평소 목소리 크고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그 선생님...절뚝거리며 걷는 저의 걸음걸이를 지적하며 저의 모습을 아래로 쭉~ 훑어보던 선생님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뭐야...쌤...신발 어디 갔어? 이런 데서 맨발로 다니면 어떡해?" 아주 큰 소리였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제 발을 주목했습니다. 갑작스레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출근길 발이 묶은 그 많은 인파들... 유난히도 많은 그 눈들이 제 발을 향하는데 정말 그 자리에서 딱 기절하고 싶었습니다.
"어...지하철에서 내리다가 승강장 아래로 빠뜨렸어...좀 조용히 말해..."
"어머머머...그래서 꼴이 이렇구나..아하하하...쌤 오늘 너무 웃긴다..."
꼴이라니요...깔깔대는 그 선생님, 정말 한대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쌤 말대로 상황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쌤 이러고 다니다가 발 다치면 안 되잖아. 일단 이거라도 신어..." 그녀가 건낸 것은 여자들이 구두나 운동화 신을 때 신는 투명한 살색 덧신이었습니다.그 얇은 덧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맨발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일단 신었습니다.
"쌤...잠깐 기다려봐...내가 뭐 다른 거 신을 거 있나 알아볼게...."
언제나 넓은 오지랍을 자랑하는 그녀는 갑자기 지하철 매표소로 달려갔습니다.
"아저씨...제 친구가 지하철 사이로 신발을 빠뜨려서 그러는데요 뭐 신을 것 좀 없을까요?"
매표소에 있는 아저씨는 "아...글쎄요...정말 딱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뭐 줄게 없는데...일단 이거라도 써봐요." 라며 검정 비닐 봉지와 전단지 한 움큼을 집어 주셨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검정 봉지와 전단지를 얻어 온 선생님은 "일단 발을 안 다치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이 덧신을 신고, 발 바닥에 이 전단지를 깔고, 그리고 이 비닐을 씌워주는 거야. 어때? 내 생각? 정말 기발하지?" 이 상황을 너무나 즐기는 듯한 그 선생님은 혼자 말하고 혼자 감탄해가며 제 발에 전단지를 깐 그 비닐을 정성껏 씌워주더군요.
"아...그럼 안되지...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인데 혹시라도 바닥에 유리라도 있으면 한쪽 발은 살려야지...그리고 누가 길에다 밤새 오바이트라도 했어봐...비닐만 쓰고 있는 발로 밟으면 얼마나 찝찝하겠어?" 리얼한 그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그래...한 쪽만이라도 신고가면 사람들이 사정이 있겠거니 하겠지...양쪽 다 맨발은 너무하잖아...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핫핑크의 원피스, 한쪽은 공주 풍의 핫핑크 굽 높은 슬리퍼, 한쪽은 검정 비닐, 절뚝거리며 걷는 제 모습은 더 눈에 띄었고, 걸을 때마다 전단지와 비닐이 부시럭 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제 발을 따라다녔습니다.
"얘...너 뭘 찍고 있니? 이 쌤이 신발을 잃어버렸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그냥 웃고 말지 뭘 그걸 찍고 그래? 너 전화기 이리 내. 어머머...쌤...사람들이 막 발 찍고 그런다...어떡하니? 구파발 맨발녀로 내일
인터넷에 뜨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걱정마...내가 못 찍게 막아줄게"
도촬을 막아준다는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제 상황을 동네방네 떠들며 광고하는 그 쌤...사진 좀 찍혀도 괜찮으니깐 조금만 작게 말해주시지...ㅜㅜ 결국 그날 폭우로 인하여 일산 쪽으로 가는 길은 도로까지 막혔고,원장님은 임시 휴원 하신다는 문자를 날리셨기에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진작 문자 주셨으면 그 꼴로 덜 돌아 다녔을 텐데...늦게 연락 주시는 바람에 물이 차오르는 도로까지 한참을 걸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