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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평범한 일상들

한순간에 정신 나간 여자 된 최악의 출근길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저희 집은 연신내였고 정발산에 있는 놀이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바로 3호선 지하철이었지요.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무섭게 내리는 장대비였지요. 정말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나갈 수 있나요. 빗속을 뚫고 지하철을 탔을 때는 이미 온 몸이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전 무슨 바람이 불었었는지 핫핑크 샤랄라 원피스에 핫핑크 공주 슬리퍼를 신고, 머리는 예쁘게 셋팅까지 말았습니다. 어설프게 부린 멋 때문에 더욱더 추레해진 몰골이었지요. 그런데...그렇게 열심히 빗속을 뚫고 지하철을 탔건만 연신내에서 구파발까지 겨우 한 정류장 이동하더니 지하철 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갑작스런 국지성 폭우로 인한 노선 침수 때문에 3호선은 구파발, 구파발 역까지만 운행합니다. 일산 쪽으로 이동하실 분들은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하시길 바랍니다." ...대략 이런 방송이었지요.

 

이런 낭패가... 안 그래도 심히 망가진 스타일 또 이 빗속을 나가야 하다니..."이런...XX 그럼 요금을 받지 말던가. 받을 거 다 받고 한 정류장 와서 내리라고 하면 어쩌라는 거야...."투덜거리며 지하철 밖으로 나오는 찰라...갑자기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며 발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잠시 어리둥절한 느낌과 함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는데, 이유인 즉 오늘따라 샤랄라하게 입은

핫핑크 원피스에 맞추어 신은 핫핑크 공주 슬리퍼 한 짝이 지하철과 승강장 사이로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평소 굽 높은 신발을 즐겨 신지 않았던 탓에 어정어정 어설프게 걸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왜 비 오는 날, 그것도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그런 옷에 그런 신발을 신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더군요. '어떡하지? 선로로 뛰어내려가 저걸 주워? 안돼...신발 한 짝을 목숨과 바꿀 수는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는데 뾰족한 생각도 나질 않고 할 수 없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려 당황한 저는 한쪽은 맨발, 한쪽은 7Cm굽의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김쌤...여기서 뭐해? 다리 다쳤어? 왜 이렇게 절어?"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 이였습니다.

평소 목소리 크고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그 선생님...절뚝거리며 걷는 저의 걸음걸이를 지적하며 저의 모습을 아래로 쭉~ 훑어보던 선생님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뭐야......신발 어디 갔어? 이런 데서 맨발로 다니면 어떡해?" 아주 큰 소리였습니다.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제 발을 주목했습니다. 갑작스레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출근길 발이 묶은 그 많은 인파들... 유난히도 많은 그 눈들이 제 발을 향하는데 정말 그 자리에서 딱 기절하고 싶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리다가 승강장 아래로 빠뜨렸어...좀 조용히 말해..."

"어머머머...그래서 꼴이 이렇구나..아하하하...쌤 오늘 너무 웃긴다..."
꼴이라니요...깔깔대는 그 선생님, 정말 한대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쌤 말대로 상황과 꼴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 한편으로는 천만다행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쌤 이러고 다니다가 발 다치면 안 되잖아. 일단 이거라도 신어..." 그녀가 건낸 것은 여자들이 구두나 운동화 신을 때 신는 투명한 살색 덧신이었습니다.그 얇은 덧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고 맨발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일단 신었습니다.

 

"...잠깐 기다려봐...내가 뭐 다른 거 신을 거 있나 알아볼게...."
언제나 넓은 오지랍을 자랑하는 그녀는 갑자기 지하철 매표소로 달려갔습니다.
"아저씨...제 친구가 지하철 사이로 신발을 빠뜨려서 그러는데요 뭐 신을 것 좀 없을까요?"

 유난히 큰 그녀의 목소리는 20m 가량 떨어진 제게도 똑똑히 들렸습니다. 웅성웅성 거리며 주변 사람들과 구파발역에서 근무하는 도시철도공사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 발로 향했습니다.

 

매표소에 있는 아저씨는 "...글쎄요...정말 딱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뭐 줄게 없는데...일단 이거라도 써봐요." 라며 검정 비닐 봉지와 전단지 한 움큼을 집어 주셨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검정 봉지와 전단지를 얻어 온 선생님은 "일단 발을 안 다치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이 덧신을 신고, 발 바닥에 이 전단지를 깔고, 그리고 이 비닐을 씌워주는 거야. 어때? 내 생각? 정말 기발하지?" 이 상황을 너무나 즐기는 듯한 그 선생님은 혼자 말하고 혼자 감탄해가며 제 발에 전단지를 깐 그 비닐을 정성껏 씌워주더군요.

 

"선생님 그럼 나 이 슬리퍼도 벗고 이쪽 발도 검정 비닐로 싸면 발 높이는 맞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까요?"

"...그럼 안되지...이건 어디까지나 임시 방편인데 혹시라도 바닥에 유리라도 있으면 한쪽 발은 살려야지...그리고 누가 길에다 밤새 오바이트라도 했어봐...비닐만 쓰고 있는 발로 밟으면 얼마나 찝찝하겠어?" 리얼한 그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그래...한 쪽만이라도 신고가면 사람들이 사정이 있겠거니 하겠지...양쪽 다 맨발은 너무하잖아...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핫핑크의 원피스, 한쪽은 공주 풍의 핫핑크 굽 높은 슬리퍼, 한쪽은 검정 비닐, 절뚝거리며 걷는 제 모습은 더 눈에 띄었고, 걸을 때마다 전단지와 비닐이 부시럭 거리는 소리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제 발을 따라다녔습니다.

 

"...너 뭘 찍고 있니? 이 쌤이 신발을 잃어버렸대...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그냥 웃고 말지 뭘 그걸 찍고 그래? 너 전화기 이리 내. 어머머......사람들이 막 발 찍고 그런다...어떡하니? 구파발 맨발녀로 내일
 인터넷에 뜨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걱정마...내가 못 찍게 막아줄게"

 

도촬을 막아준다는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제 상황을 동네방네 떠들며 광고하는 그 쌤...사진 좀 찍혀도 괜찮으니깐 조금만 작게 말해주시지...ㅜㅜ 결국 그날 폭우로 인하여 일산 쪽으로 가는 길은 도로까지 막혔고,원장님은 임시 휴원 하신다는 문자를 날리셨기에 택시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진작 문자 주셨으면 그 꼴로 덜 돌아 다녔을 텐데...늦게 연락 주시는 바람에 물이 차오르는 도로까지 한참을 걸었네요.

당시 연인 사이였던 남편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더군요. 저와 제 스타일을 잘 알다보니 그 상황이 너무 훤~하게 그려진다나요. ㅋㅋㅋ 오늘이 4월 4일 이네요. 흠.... 4.4
뭐...날짜가 대수인가요...!! 모두들 씩씩하고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