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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랑이네 엿보기/씩씩한 한결이

벌건 대낮에 눈앞에서 아기 도둑맞을 뻔했다

아들과 딸을 데리고 놀이터에 갔습니다.
어린이집 끝날 시간이라 놀이터에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딸내미는 신나게 뛰어 놀고 아직 어린 아들은 벤치 엄마 옆에 앉아서
형, 누나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다가옵니다.
아파트 단지 놀이터라 대부분은 이웃들이고 아는 얼굴들인데 그 할머니는 낯설었습니다.
워낙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손주 생각 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알은체들을 많이 하셔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옆에 앉아서 몇 개월이냐,
애가 참 똘망똘망 하다 하시던 할머니는 대뜸 잘 놀고 있는 아이를 안으셨습니다.

요즘은 남의 아이들 안을때는 대부분 엄마의 허락을 받는데...
당황스럽긴 했지만 옛날 분이시고 그냥 이뻐서 그러려니 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었습니다.



그때 딸내미가 부릅니다.
평소에 못 올라가던 놀이기구에 올라가서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어...그래...우리 하랑이 진짜 잘하네..."
어쩌고 저쩌고 잠시 딸과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아들을 안고 멀리 가버리시는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막 따라갔습니다.
걸음이 어찌나 빠르시던지...
안 그래도 낯가림 심한 아들은 자지러지게 울고 말이지요.

제가 큰 소리로 계속 부르자 뒤를 돌아 보시고는
"아니...난 아이가 낯을 가리나 안 가리나 실험 해 보려고 그랬지...
원...사내녀석이 뭐 이리 낯을 가리고 울고 그런데..."

정말 울컥하는 기분에 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고
할머니가 단순한 장난이고 실험이셨다는데...그러고 참았습니다.
약 2분 남짓의 소동이었지만 놀란 아들은 한참동안 울고불고 난리였습니다.
아들을 달래고 보니 그 할머니는 멀찍이 가버리셨더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한 아기 엄마가 제 옆으로 다가옵니다.
놀이터에서 가끔 보던 아기 엄마로... 안면은 있지만
평소 인사도 안하고 지내던 사이인데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저 할머니 진짜 이상하죠?"
"아...네...좀 놀라서...말 없이 아이를 대뜸 데리고 가시니...ㅡㅡ;;"
"그러니깐요.
좀 아까 우리 아이도 대뜸 멀리 데리고 가버리셔서 제가 한참 쫓아가서 데려왔어요.

저도 어찌나 당황스럽고 놀랬던지...처음 뵙는 얼굴인데...보신적 있으세요?"
"아니요. 저도 처음 뵙네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아기 엄마도 저와 똑같은 일을 좀 전에 당했나 보더라구요.
그래서 그 할머니의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었구요.
그 할머니 말씀대로 정말 아이가 예뻐서 장난을 치신 건지는 모르지만...

세상이 너무 흉흉하다 보니 낯선 인물이 상식 이상의 관심이나 장난을 치는 것은 참 거북합니다.
더더군다나 허락도 없이 남의 아이를 안고
말 없이 엄마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버리고
...


예전에는 한 마을에 살면 다들 아는 얼굴들이고
그래서 지나가다가 아이가 이쁘면 안아도 주고 인사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요즘은 그런 세상은 아니니깐요.

어찌보면 각박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 뒤로 약 3주 정도 지났지만 아직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난적은 없습니다.
찰라의 시간이었지만 그때의 당황스럽고 불쾌했던 기분이 문득문득 다시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진짜...그 할머니 말씀대로 그냥 단순한 장난이셨을까요? ㅡㅡ;;
정말이지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